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15면] 총, 균, 쇠 - 사람 머리는 다 똑 같고 환경이 그들의 운명을 갈랐다에 대한 상세정보
[15면] 총, 균, 쇠 - 사람 머리는 다 똑 같고 환경이 그들의 운명을 갈랐다
작성자 언론사 등록일 2023.03.15

생태인류 과학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인류 문명의 발전과 힘의 불균형을 초래했던 역사적 사 실의 근거를 과학적으로 밝혀 퓰리처 상을 탄 책 이다. 제목만으로도 그가 밝혀 낸 사실의 90%는 척 이해가 간다. 방대한 세부 탐사는 외우려 할 필 요 없이 슬렁슬렁 읽으며 제목으로 알아 챈 메시 지를 확인하면 될 책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거의 없으며 핵심은 이렇다. 지구상 어느 지역이든 사람(인종)의 머리는 우열의 차이가 없다. 다만 그 들이 처한 환경의 차이가 문명 발전의 우열을, 정 복하느냐 정복당하느냐의 운명을 가렸을 뿐이었 다는 것이다. 이 핵심 메시지의 과학적 방증은 크 게 다음 네 가지다. 첫째, 유럽 문명의 원천인 ‘비옥한 초승달 지대’ 가 힘의 중심을 왜 지금의 서유럽 지역에 빼앗겼 느냐는 것이다. 둘째, 남북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대륙이 서로 독립적으로 살면서 발전하다가 불과 15세기에 만났는데 왜 아메리카가 유럽을 정복하 지 못하고 반대로 유럽이 아메리카를 정복하게 됐 느냐는 것이다. 셋째, 중국의 황하문명은 ‘종이, 화 약, 나침반, 인쇄술’의 4대 발명품의 원천지였고 유 럽보다 앞선 문명을 이어 왔는데 중세 이후 왜 유 럽에 뒤지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넷째, 그런 일들 을 초래한 이유가 바로 <총, 균, 쇠>였는데 정복당 하느냐, 당하지 않느냐의 기로를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바로 근처의 섬 뉴기니에서 극명하게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총’은 과학기술이 만든 무기 였고, ‘균’은 환경의 차이가 만든 생각지도 못한 무 기였으며, ‘쇠’는 신석기와 청동기처럼 전체적인 문 명의 차이의 무기였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 B.C. 4000~3000년경 유럽 지역의 힘의 중심은 바빌로니아에서 페르시아 제 국에 이르기까지 줄곧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있 었다. 그러다 B.C. 4세기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과 B.C 2세기 로마제국을 계기로 힘의 중심이 서쪽 으로, 로마제국 멸망 후에는 서유럽과 북유럽 지 역으로 힘의 중심이 이동했다. 비옥한 초승달 지 대 국가 쇠약의 원인은 불운한 환경과 또 그 환경 을 스스로 파괴한 자승자박이었다. 오늘 날 비옥 한 초승달 지대는 더 이상 전혀 비옥하지 않다. 사 막, 반사막, 스텝, 침식과 염분으로 농업과 거리가 멀어졌다. 초기 문명의 발전으로 급증하는 에너지 원과 건축 등이 이 지대 숲들의 파괴를 불렀다. 그 런데 이 지역의 강우량이 적어 숲의 재생이 문명 이 저지르는 파괴를 따라가지 못해 황폐화 되었던 것인데, 북유럽과 서유럽은 강우량이 많아 식물이 더 빨리 재생하는 행운이 따랐다. 농작물, 가축, 기 술, 문자 등을 모두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받아 들인 셈인데 ‘자연 환경’ 때문에 힘의 중심을 차지 한 것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은 홍적세 말기에 말이나 소 같은 가축화 가능한 대형 포유류 동물들이 전멸했기에 모든 동력은 사람의 힘에 의지했다. 말과 소가 없 었던 만큼 농업 생산력이 낮았고, 이에 따른 잉여 생산물의 부재는 농사 외의 기술 분야에 전념하 는 전문가의 분화를 어렵게 했다. 더구나 ‘광활한 지역의 적은 인구’는 좁은 유럽과 달리 신기술의 전파도 느린데다 ‘필요’가 절실하지도 않아 철기문 명에도 이르지 못했다. 당연히 유럽과 같은 발전된 문자체계와 정치조직도 미생이었고 소, 말, 돼지 등 가축들로 인한 치명적 전염병균들도 없었다. 1532년 11월 16일 스페인의 정복자(도살자) 피 사로와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가 페루의 고지대 도시 카하마르카에서 처음으로 마주치게 된다. 168 명의 스페인 오합지졸은 62 명의 말을 탄 기 병과 쇠로 된 갑옷, 투구, 칼, 창 등으로 중무장한 106 명의 보병, 그리고 몇 자루의 화승총이 전부 였다. 이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국 가인 잉카제국 8만 명의 병사를 한 방에 유린한 다. 8만 병사의 무기는 고작 나무 곤봉과 돌팔매 였다. 더구나 이들은 문자로 인해 과거에서 배우 는 ‘인해전술’ 같은 전략적 지식도 없었다. 결국 유 럽인이 아메리카를 일거에 정복하게 된 초기 전투 는 ‘거칠고 빠른 말, 벼락 같은 총, 철제 무기 중무 장’ 덕분이었고, 이후 주류가 된 요인은 정보와 지 식을 전달하는 문자였다. 또한 아메리카에는 유럽 인에게 치명적인 병균이 ‘다행히도’ 없는 반면 유 럽인들이 소, 말, 돼지 등 온갖 가축들과 부대끼는 사이에 생긴 천연두, 홍역, 발진티푸스, 흑사병 같 은 병균들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고비고비 전멸 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중국의 만성적 통일과 유럽의 만성적 분열. “차 이나(China)는 영어로 ‘도자기’라는 보통명사이기 도 하다. 이는 한 때 중국이 도자기로 유럽을 흔들 었다는 증거다. 자기는 특히 1,300도의 고온에서 흙을 쇠처럼 구워내는 기술이다. 16세기까지 자기 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 조선, 베트남 뿐 이었다. 당시의 자기 생산 기술은 지금의 반도체에 버금갈 신기술이었다.” <문소영 지음, 못난 조선> “산업혁명으로 서양의 과학이 발달하기 전까지 는 중국이 서양으로부터 목을 메고 사들여야 할 물건들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향신료, 비단, 도자 기 등 유럽에 팔 동양의 ‘신 문물’은 넘쳐났다. 그런 데 유럽의 무역상들이 중국의 물건을 살 수 있는 도구는 ‘은’이 유일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은 전세 계의 은을 빨아 들이는 블랙홀, 유럽의 은(銀)은 중국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 황실, 고관귀족, 부 호들의 안방 밑 토굴에 숨어버렸다. 네덜란드를 대체한 영국 역시 중국과의 무역을 위해선 파운드화가 아닌 ‘은’이 필요했다. 그럴려 면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은을 다시 회수해야 했다. 그래서 사용한 방법이 ‘아편’이었다. 뒤늦게 이런 음모를 알아챈 중국이 반기를 들면서 일어 난 아편전쟁의 속내는 사실상 ‘금과 은’을 축으로 하는 양 진영의 화폐전쟁이었고, 금융에 무지했던 중국의 완패로 끝났던 것이다.” <류방승 옮김, 백 은비사, RHK 출판>. 이렇게 그 옛날부터 은을 둘러싸고 유럽과 팽팽 하게 화폐전쟁까지 벌였던 중국이 유럽에 완패하 게 된 것은 ‘통일된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에 의해 처음 통일제국이 된 중국은 이후 몇 번의 분열이 있긴 했지만 계속적인 통일 제국의 길을 걸었다. 중세까지 중국은 정치적 힘, 항해술, 재해권 등에서 세계를 선도했다. 1405년 명나라 ‘정화의 원정’은 당시 유럽으로서는 생각 할 수도 없는 대규모 선단으로 16년에 걸쳐 7차 원 정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권력 다툼과 왜구의 침략을 막는다며 항해를 금지시켰고, 조선소와 기술서적들을 모두 없애버렸다. 통일제국이기에 황제 한 사람의 명령 한 마디로 완벽하게 없애 버릴 수 있었다. 기계, 기 술에서 국가를 수백 년 후퇴시켜 버린 것이다. 현 실 전투에서 총, 칼, 화살보다 효과가 적다는 이 유로 화승총에 대한 연구도 기피했다. 그런 결정 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뚱의 한 마디 에 전국의 모든 학교가 5년 동안 문을 닫는 것으 로 반복됐다. 반면 유럽은 먼발치에서조차 통일을 바라본 적 이 없었다. 14세기까지 1,000 개에 달하는 독립소 국, 1500년에는 500개 소국, 1980년 대에도 25개 국을 유지하다 최근에 다시 40 개 국으로 늘었다. 유럽의 통일이 어려운 것은 중국의 단순한 해안선 과 달리 고립된 큰 반도가 5 개나 되는 복잡한 유 럽의 해안선과 지형 때문이다. 콜럼부스가 아메리 카로 떠날 수 있었던 것도 각축을 벌이던 국가들 중에 스페인 국왕이 그를 후원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의 피정복과 고립유 지의 차이는 결론적으로 양 지역에 살던 미개했던 원주민들의 우열이 아니라 자연환경과 병원균이 었다. 특히 뉴기니의 행운은 유럽인들이 뉴기니에 발을 처음 들였을 때는 유럽 의약학의 발전이 ‘균’ 들을 하나하나 제압하기 이전이었고, 의약학의 발 전 이후엔 정복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두껍고 방대한 <총, 균, 쇠> 의 끝을 이렇게 정리했다. “모든 문화적 차이는 환경적 차이의 산물이다. 역사를 예측하기 어려운 것은 역사의 진행에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역사의 법칙 하나는 과거의 우위 가 결코 미래의 우위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 이다. 우리가 살면서 진정 유념해야 할 메시지다.


글_최보기 북칼럼니스트

첨부파일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