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8면] 우리나라 역사가 숨 쉬는 신문史 한 발자국 다가가기에 대한 상세정보
[8면] 우리나라 역사가 숨 쉬는 신문史 한 발자국 다가가기
작성자 언론사 등록일 2023.04.06

순천대학의 신문사. 우리는 그 자랑스러운 500호 발행을 맞이하여 지난 달 서울의 신문박물관에 방문했다. 박물관은 국내 최초로 유 일하게 신문에 대해 전시한다는 점에서 상징성을 가지고 있으며, 우 리나라 역사의 흐름과 함께 수많은 사건을 겪었던 신문을 모아놓음 으로써 귀중한 역사의 축소판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부터 그곳에서 보고 느낀 시대의 거울이자 언론의 기둥, 신문의 몇 가지의 사건 을 되짚어보자.


한국 역사상 최초로 발행된 한성순보는 나라의 문호개방과 국민 계 몽을 이념으로 삼아 국내외소식에 대한 기사를 주로 실었다. 이는 오 랜 시간동안 정체되어있던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개화운동 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민간인에 의해 처음 제작된 독립신문은 논평과 비판을 신문의 핵심적인 기능으로 삼았다. 굳건한 저항정신 을 통해 당대 현실의 부정부패와 어두운 부분을 사실적으로 고발하여, 19세기 말의 한국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독립신문의 이러한 정신은 현재까지도 한국 언론의 전통으 로 내려오고 있으며, 민중의 계몽을 위해 막대한 임무를 다한 상징적 인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으로 정부로부터 지속적인 압박을 받은 독립신문은 3년여 만에 폐간되어 결국 그 당찬 행보를 멈추게 된다.


조선을 집어삼킨 일제는 기존의 모든 신문을 없앤 채 매일신보와 경 성일보만을 남겨두었다. 이는 총독부 기관지로, 일제의 식민지 통치 를 합리화하고 미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항거하여 3? 만세운동을 전개한 민중의 노력으로 인해 1920년 동아일보, 조선일 보, 시사신문의 창간이 이루어지게 된다. 민간신문들은 문맹 퇴치 운 동을 벌여 문자를 보급하고 민족의식을 북돋았다. 그들은 일제의 가 혹한 탄압과 검열 속에서 발매 금지를 당하고, 협조적 기사를 강요받 으면서도 끊임없이 독립군의 소식을 보도하고 독립운동 기사를 중 점적으로 다루었다. 마침내 1940년 일제는 모든 민간신문을 폐간시 켜, 많은 언론인들의 노력을 헛되이 만들었다.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언론정책실시하고 언론윤리위원회신설하였으며, 언론사에 기관 원을 상주시키는 등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또한 1972년 유 신헌법을 제정하고, 이를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하지 못하도 록 금지시켰다. 이에 반대한 많은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 표하고 백지 격려광고를 만들었으며 신문제작 거부 농성을 벌이는 등 언론자유수호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 고 유신독재 종언 후에 전두환 군부의 언론 통폐합이 시행되면서 언 론계는 또다시 혼란기를 맞이한다. 이 격동의 시기는 1987박종 철 고문치사 사건이 신문에 보도됨에 따라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 고 6.29 민주화 선언이 발표되면서 언론의 자유를 되찾아 비로소 마 침표를 찍게 된다.


신문은 이렇게도 쓰라린 역사를 지닌 채 지금까지 우리 곁에서 많 은 시간을 함께 해왔다. 수 많은 아픔과 희생, 용기가 있었기에 현재 의 언론이 존재하고 되살아날 수 있었다. 한국 언론이 앞으로도 더 욱 찬란한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관심어린 시선과 눈길 이 필요할 것이다.


_마이삭 기자

첨부파일
맨위로 가기